에이브라함 링컨의 위트를 배우자
1. 링컨의 생활사
에이브라함 링컨의 외모는 "비쩍마르고 매력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고 주변 사람들이 말했다"고 합니다. 또, 시골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와서 미국남부의 사투리가 섞이어 특이한 말투였는데 특히나 반전적인 것은 가느다란 목소리였다고 합니다.
계속 외모에 대한 지적과 비하를 하는 것 같은데 저는 그저 책이나 글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을뿐입니다.. 링컨의 팬이신 분들은 너그러이 이해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심지어 그의 얼굴은 반대세력등 비난을 퍼붓는 일부 정적인 사람들에겐 고릴라라고 비판받는 소리 까지 들었다고 하네요. 참고로 그 중에는 연방군 사령관이자 그의 재선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가 된 매클레런도 있었습니다.
그 중 일례로는 더글러스와의 논쟁 중에 더글러스가 링컨에게 "두 얼굴의 사나이"라고 말하자 "저한테 얼굴이 하나 더 있다면 잘생긴 얼굴로 하고 나왔지 이 얼굴을 하고 다니겠습니까!"라고 받아 쳤다고 합니다. *더글러스는 본래 링컨을 망신주기 위해 일격을 가할 멘트로 준비를 했지만 이야기를 했다가 링컨의 재치있는 카운터에 할 말을 잃어 버렸다고 합니다.
2. 링컨의 유머와 성격
평소 위트가 굉장했고 언어의 마술사 였습니다. 이런 재치와 유머를 대인관계에서도 십분 발휘하여 자신의 리더쉽을 입증하고 굳건히 하는데에 큰 역할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링컨이 재치있고 재미있는 사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릴적 성격이 제법 소심했는지 대놓고 남 앞에서는 욕이나 비난을 못하고 뒷담화를 하거나 비밀 노트에 그 사람을 욕하는 글을 써 놓았다고 합니다. 이런 행동들이 사람의 능력으로 발전하게 된 것 같습니다. 나중에 가서는 재치가 넘치는 위트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보고있습니다. 게티즈버그의 연방군 사령관 '조지 미드'가 대표적인 경우인데요, 미드의 경우는 게티즈버그 전투 승리 이후에 후퇴하는 남부연합군을 쫓지 않았는데 부상때문인 부분이 있었지만 사실상 전쟁의 종결을 방치했던 것도 있습니다. 며칠 사이에도 충분한 기회가 있음에도 놓치게 되었는데 이런 실수를 거두고도 즉각 해임이나 공개적인 비난을 하지 않았던 사건이 있습니다.
링컨의 위트는 자신을 찾아오는 공직희망자들이나 의회와의 관계를 유지할 때 특히 요긴하게 쓰이는 능력이었을 것입니다. 한번은 장관 한 명이 지병으로 사망하자 그 자리에 들어가겠다는 공직희망자 중 한 명에게 "장의사가 동의하면 관속에 들어가도 좋습니다"라고도 했었고 매일같이 공직희망자에 시달리다 전염력이 강한 병에 걸렸을 때에는 주치의를 보며 "드디어 제가 뭘 좀 나눠줄만한 게 생겼네요." 하고 빙그레 웃기도 했습니다. 이런 링컨의 유머와 재치는 고리타분하게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상류층들과는 달리 어릴적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겪으며 자유분방하게, 때로는 좌절도 겪으며 힘들게 자랐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또 그는 계모와 농담을 자주 주고 받았다고 하는데 그 영향이 조금은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출신 성분 탓에 행동에도 허세나 위선이 없어서 주변의 동료, 서민층의 지지를 얻기에도 긍정적인 요인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업무 중에도 책상 위에 발을 올리고 책을 읽는 등 거리낌없이 행동했다고 합니다. 성격은 극E였지만 어떤 눈치가 빠른류의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일례로 그의 측근들은 링컨이 틈만나면 농담이나 시시콜콜한 유머를 하는 것이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고 회고했다고 합니다.
3. 대인배 링컨이 되기까지
젊었을 적에는 평소에 영 맘에 안 든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놀리는 말을 작은 쪽지에 써서 길가에 슬쩍 떨어뜨리고는 누군가 그걸 주워 읽고 재미있어 하는 걸 몰래 지켜보면서 즐거워 했다고 합니다. 어느날 쉴즈라는 사람의 나쁜 점을 지적하는 글을 익명으로 신문사에 올렸는데, 해학, 풍자적으로 쓴 글에 구독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그런데 쉴즈가 게시자가 링컨이라는 걸 알아내고서는 다짜고짜 찾아와 결투 신청까지 했다고 하네요. 링컨은 결투를 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지간히 화난 쉴즈가 계속 밀어붙였기에 어쩔 수 없이 약속장소까지 갔다. 다행히 링컨의 친구 한 명이 적극 중재를 해준 덕에 결투 당일 결투가 취소되어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죽음의 공포를 맛본 링컨은 큰 충격을 받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고, 타인을 조롱하는 짓을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고 합니다. 끝으로 쉴즈와는 좋은 친구로 남게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후로도 비난하는 글이나 말을 안한 것은 아니었고, 결투사건 이후로는 그냥 혼자만 읽고 즐겼다고 합니다. 젊은 시절의 링컨은 자수성가한 변호사답게 거리낌없이 남을 모욕하거나 자기 도취적인 발언을 일삼다가, 이 사건을 발단으로 변화하기 시작해 정계에 진출하는 시점에서는 좀더 진중한 링컨으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링컨은 자신의 삶에서 교훈을 얻고 성장한 대표적인 위인입니다. 한 일화가 있습니다. 대통령 취임 후, 에드윈 스탠턴을 국방부장관에 발탁시킨 후 , 스탠턴이 사이드 육군장관과 사람들 앞에서 대판 싸우고 나서 링컨에게 찾아온 적이 있었는데, '사이드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했다'며 투덜대자 링컨이 '어떻게 하겠냐'고 의견을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스탠턴이 '편지를 보내 뜨거운 맛을 보여줄 것'이라며 으름장을 놓았다고 합니다. 듣고있던 링컨은 '조금 전에 나한테 털어놓았던 것까지 편지 내용에 쓰십시오'라고 했다. 그러자 스탠턴은 바로 장문의 편지를 썼고, 편지를 읽어본 링컨이 '이제 부치기만 하면 됩니까?'라고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스탠턴은 그렇다고 하자 링컨이 한마디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저 벽난로 속으로 부치십시오. 분노로 쓰는 편지는 칼이 되어 상대를 찌르게 됩니다."라고 스탠턴을 설득했고, 스탠턴도 마지못해 편지를 벽난로 속에 던졌다고 합니다.